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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이야기

귀속지위와 성취지위

by 버스빌런 2021. 3. 7.

대학교 어문계열 학과에 입학했다. 학과 동기들, 선배님들과 서로 인스타그램 맞팔을 했다. 동기와 선배의 인스타그램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서울 상위권 대학 어문계열이어서 그런지 외고나 국제고를 졸업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문득 왜 자신이 졸업한 고등학교를, 심지어 졸업기수까지 인스타그램 프로필 칸에 썼는지 궁금해졌다.

일반고를 나온 내 입장에서 고등학교란, 중학교에서 3년 내내 잠만 자도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심지어 고등학교를 골라서 갈 수 있었다. 서울시 교육청 소속 고등학교 중에서 두 곳, 내가 사는 지역 교육청 소속 고등학교 중에서 두 곳. 총 네 곳을 지원할 수 있었다. 당연히 저 네 곳은 내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에 대한 자부심도, 소속감도 크지 않다. 페이스북처럼 프로필칸에 출신 학교를 써달라고 계속 알림이 울리지 않는 한 쓰지 않는다. 인스타그램 같은 SNS에 자신이 졸업한 고등학교를 쓰는 것은 셋 중 하나다.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거나, TMI를 좋아하거나, 비평준화가 되기 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거나.

사회적 지위로 따져보면 나에게 고등학교란 귀속지위에 가깝다. 고등학교 내내 잠만 자고 졸업장을 딴 사람이 한두명이 아니다. 일반고 인문계열에서 3년 내내 잠만 잔 사람이 절반은 될 것이다. 오죽하면 내가 한국조퇴공사, 대명리조트 스쿨이라는 패러디를 교실 칠판에 그렸겠는가. 그러므로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출신 고등학교와 졸업 기수를 적는 것은 서울 출생, OO의 아들, 남자라고 적는 것 만큼이나 나에게 이상한 것이었다.



하지만 국제고나 외국어고를 나온 사람 입장에서 보면 조금 다를 것이다. 국제고나 외국어고를 가기 위해 중학교 때부터 시험을 잘 보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책도 열심히 읽었을 것이다. (물론 나도 그랬다) 국제고나 외국어고를 가기 위해 입학시험이나 면접도 봤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붙은 국제고나 외국어고에서 치열한 내신경쟁을 했을 것이다. 중간에 일반고로 전학을 가지 않고 버텨서 졸업했기에 이에 대한 성취감도 클 것이다. 아마 국제고나 외국어고를 졸업한 사람 입장에서 고등학교란 성취지위일 것이다. 입학, 재학, 졸업까지 본인이 이뤄내기 위해 노력한 것이 많으므로.

처음에 일반고를 졸업한 나는 이들을 보며 신기하기도 하고 학교에 대한 소속감이 커서 부럽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고등학교 졸업한 게 그렇게 큰 자랑인가 싶기도 했고 그들만의 리그를 만드는 듯하여 어이가 없기도 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바라보는 시선이 서로 다른만큼, 서로 존중해야 한다. 일반고를 졸업한 사람의 입장과 특목고, 자사고를 졸업한 사람의 입장을 서로 들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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